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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38장 번역과 해설-대장부(大丈夫)

by 도반스키 2025. 11. 23.

도덕경 38장
-대장부(大丈夫)


[원문]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잉之.
상인위지이유이위, 상의위지이유이위, 상례위지이막지응, 칙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시이대장부, 처기후, 불거기박.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처기실, 불거기화, 고거피취차.


[번역]

높은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다.

 

덕(德)을 앞세우는 것은 무위(無爲)를 무(無)로써 한다.
인(仁)을 앞세우는 것은 행위(爲)를 무로써 한다.
의(義)를 앞세우는 것은 행위를 유(有)로써 한다.
예(禮)를 앞세우는 것은 행위를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팔을 걷어 붙이고 억지로 이끈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다.

예를 앞세우는 자는
중심과 믿음이 얄팍한 자로써,
모든 혼란의 원인이다.
지식을 앞세우는 자는
도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자로써,
모든 어리석음의 시발점이다.

 

그래서 대장부(大丈夫)는
두터움에 머무르지, 얄팍함에 안주하지 않는다.
본질에 머무르지, 화려함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去彼取此).


[개념 정리]

-덕(德): 도덕경 38장은 덕경의 첫째장이다. 클 덕/덕 덕(德)자는 “곧은 마음으로(直:곧을 직+心:마음 심), 길을 걷는 사는 사람(彳:조금 걸을 척)”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덕은 영원한 무(無:God)라는 대도(大道)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곧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덕은 영원한 유(有:신의 작용)인 그 길(大道)을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곧은 마음으로 한걸음 한 걸음씩, 유(有:신의 작용)의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도덕(道德)은 본질이고, 인의예(仁義禮)는 현상이다. 도덕이라는 본질을 따르면, 사랑(仁)과 정의(義)와 예절(禮)이라는 현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본질을 따르는 자를 대장부(大丈夫)라고 한다. 본질이 없이 현상만을 앞세우는 자를 위선자(僞善者)라고 한다.

 

-예답지 않은 예, 의답지 않은 의를 대인은 행하지 않는다.-맹자

 

-무위(無爲), 행위(爲): 행위란,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무위란, ‘자신의 뜻을 비우고 무(無:God)의 뜻을 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14:36”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현상을 버리고 본질을 취한다. 본질을 취하면 현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거피취차(去彼取此)는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 “피안으로 가려면 지금 여기를 다스려야 한다.” 이 차(此)자는 “지금, 여기”라는 뜻이 있다.


[해설]

 

1. 도가 사라질 때, 좋은 말들이 넘쳐난다 

도덕경 18장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대도(大道)가 버려져서 인의(仁義)라는 개념이 생겼다.”

 

 도가 온전히 살아 있을 때는, 굳이 ‘인의(仁義)’라는 말을 앞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仁), 자기 안의 옳고 그름을 따라 사는 것(義)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름조차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경 19장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사람들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사람들의 효성과 사랑이 회복될 것이다.”

 

 여기서 ‘절성기지, 절인기의’는 그 단어 자체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간판이 되어버린 인·의·성·지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 안에 있던 소박한 본질을 회복하자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견소포박, 소사과욕”이에요. 눈앞의 소박함을 다시 보고, 통나무 같은 순박함을 품고, 사사로움과 욕심을 줄이라는 것이지요.

 

도덕경 38장은 바로 이 흐름을 이어서, 더 정밀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다.

 

18장이 “대도가 폐해지니 인의가 생겼다”고 큰 붓으로 그린다면,
38장은 도 → 덕 → 인 → 의 → 예라는 계단을 그려 주면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어긋나는지 한 칸 한 칸 짚어주는 장입니다.

  • 18장: “대도가 버려졌다 → 인의, 지혜, 효·충이라는 ‘좋은 말’이 넘쳐난다.”
  • 19장: “그래서 그 간판들을 끊고, 소박함·순박함을 회복해야 한다.”
  • 38장: “애초에 인·의·예는 도와 덕에서 나온 열매였는데,
    도와 덕이 사라지자 껍데기만 남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38장의 상덕(上德)·하덕(下德) 이야기는,
“알맹이가 있는 덕”과 “간판만 남은 덕”이 어떻게 갈리는지를 보여주는 설명이 됩니다.


2. 인·의·예의 본래 의미와 뒤집힌 사랑

본래 도와 덕에서 흘러나온 인·의·예의 결실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인(仁) : 타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상대의 연약함을 품어주고, 그의 입장에서 함께 아파하고, 대신 손해를 감수해 주는 마음이지요.
  • 의(義) : 자기를 향한 시비지심의 발현입니다.
    “이건 내가 봐도 아니야”라고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내면의 양심, 자기에게 먼저 엄격한 마음입니다.
  • 예(禮) : 타인을 향한 사랑과 자기를 향한 절제가 한 몸이 되어 드러나는 외적 표현입니다.
    사랑이 질서를 입고, 절제가 몸짓과 말투, 거리 두기와 배려로 드러난 아름다운 형태가 예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구조는 이렇습니다.

도(道)와 덕(德)이 살아 있음 →
그 안에서 **타인을 향한 사랑(仁)**과 **자기에 대한 양심(義)**이 자라남 →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예(禮)**로 자연스럽게 표현됨

 

 그런데 도와 덕이 사라지고 나면, 이 구조가 정반대로 뒤집혀 버립니다.

38장이 말하는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라는 말은,
도덕이 풍성해서 인의예가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도와 덕이 사라진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인·의·예라는 말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양심과 예절의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 자기에 대해서는 인(仁)으로 포장된 관용이 작동합니다.
    “나도 사람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내 사정은 이해해 줘야지” 하며, 자기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느슨한 사랑을 베풉니다.
  • 타인에 대해서는 의(義)의 이름을 빌린 심판이 작동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정의롭게 말하면…” 하며, 남을 자르고 재단하는 칼날로 ‘의’를 사용합니다.
  • 그리고 **예(禮)**는 타인을 살리는 배려가 아니라,
    “남에게 강요하는 형식”으로 전락합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의 없게 왜 그래요?”라며,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규칙을, 타인을 통제하는 도구로 쓰게 됩니다.

본래 인은 타인에게 향하는 사랑이고, 의는 자기에게 향하는 양심이었으며,
예는 사랑과 절제의 조화로운 표현이었는데,

도와 덕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자기에게는 사랑(관용)이고, 타인에게는 정의(심판)이고,
예는 남을 누르는 형식
으로만 남습니다.

 

 18장이 말한 “지혜가 출현하여 큰 위선이 생긴다”는 말씀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좋은 단어들은 그대로인데, 방향과 사용처가 완전히 뒤집혀 **위선(僞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맹자는 “예답지 않은 예, 의답지 않은 의를 대인은 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38장은 이 말을 도덕경 식으로 풀어,

예를 앞세우는 자는 충과 신이 얄팍한 자요,
모든 혼란의 시작이다.

라고 진단합니다.

 

겉으로는 예절과 정의를 말하지만, 안에는 사랑과 양심이 비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쭉정이만 남은 인·의·예”입니다.


3. 상덕과 대장부 – 본질에 머무르고, 쭉정이는 흘려보내기

그렇다면 도덕경이 말하는 **상덕(上德)**은 어떤 사람일까요?

“높은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다.”

 

상덕의 사람은 도를 깊이 품고 있어서,
굳이 “나는 인의예를 지키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 인이라는 말을 내세우지 않아도, 타인을 향한 사랑이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 의라는 깃발을 들지 않아도, 자기 자신에게 먼저 엄격한 양심이 그를 이끌고,
  • 예를 강조하지 않아도, 상대를 살리는 배려와 자기 절제가 몸짓과 말투에 배어 있습니다.

반대로 하덕의 사람은,

  • 덕을 잃어버린 자리가 허전해서,
    “나는 정의롭다, 나는 예의 바르다, 나는 사랑이 많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 그래서 인·의·예의 간판은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냉혹하고,
    예를 명분 삼아 남을 제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38장은 마지막에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래서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무르고, 얄팍함에 머물지 않는다.
실상에 머무르고, 화려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去彼取此).”

 

여기서 **“저것(彼)”**은
도와 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간판으로서의 인·의·예,
위선과 형식으로 굳어져 버린 말들입니다.

 

**“이것(此)”**은
지금 여기에서, 내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 타인을 향한 사랑(仁),
  • 나 자신을 향한 정직한 양심(義),
  • 그 둘이 어우러진 사랑의 예절(禮),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낳는 도와 덕의 본질입니다.

대장부는,

  • 인·의·예를 버리자는 사람이 아니라,
  • 간판만 남은 인·의·예(저것)를 버리고,
    도와 덕에서 다시 자라나는 살아 있는 인·의·예(이것)를 선택하는 사람
    입니다.

18장에서 “대도가 폐해지자 인의가 생겼다”는 탄식을 듣고,
19장에서 “간판을 끊고 소박함을 품어라”는 요청을 들었다면,
38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너의 사랑과 양심과 예절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돌아보라.
간판을 붙들지 말고, 근원을 붙들라.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이 질문 앞에 서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도와 덕이라는 본질을 살리는 인·의·예 안에 서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사랑으로 감싸고 타인을 정의로 제단하는,
쭉정이 인·의·예
안에 머물고 있는가.

38장은 그 갈림길에서,
우리에게 조용히 “대장부의 길”,
두터움과 실상에 머무르는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tF0gaQIx0JM?si=J-W8w2fZ1YGyKmAE

도덕경 38장을 노래로 즐겨 보아요~!